그만두고 싶지만 후회할까 봐 겁나는 가그린의 고민

가그린의 고민
“그만두고 싶지만 후회할까 봐 겁이 나요.”
첫 직장을 8년째 다니고 있어요. 5년 차까지는 일이 재밌고 일을 잘하고 있다는 성취감도 컸어요. 그래서 야근을 해도 힘들기보다는 뿌듯한 마음이 컸고, 이 분야에서 더 오래 일하고 싶다고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조금씩 지치는 감정이 쌓이더니, 작년부터는 완전히 번아웃이 온 것 같아요. 환기 삼아 여행도 다니는데, 아무리 쉬어도 회복되지 않는 느낌이고 오히려 체력만 더 깎이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성장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느낌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일이 재밌고 ‘잘 맞는 일이긴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사람 스트레스도 거의 없고 분위기도 온화해서 이 정도면 괜찮은 회사라는 생각에 쉽게 퇴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다 며칠 전, 주말에 일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너무 벅차서 길가에 주저앉아 버렸어요. ‘이젠 진짜 못 하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명확하게 들었어요. 그동안 뭐든 기대 이상으로 해내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감으로 살아왔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는데, 그날은 이젠 못 하겠다고 느꼈어요.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던 거 같아요.
전직이나 이직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 회사에서 더 성장하고 싶다는 열정도 없어요. 그냥 모든 게 버겁고, 쉬면서 책이나 좀 읽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만두기에는 아직도 불안하고, 후회할까 봐 겁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상태로 계속 다녀도 괜찮은 걸까요?

밑미 메이트 지숙의 답변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내 마음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헤아리는 시간과 여유를 죄책감이 없이 가져보세요”
안녕하세요.가그린님, 반갑습니다. 저는 지숙이라고 해요.
먼저 사연을 보내주신 덕분에 저도 돌아보게 되었다는 점, 감사드리고 싶네요. 가그린 님의 고민을 들여 보다 저의 모습이 겹쳐서 놀랐습니다. 저 또한 주기적으로 번아웃이 오는 사람인지라 소모되고, 힘든 상황 속에서 주저앉아 아무것도 못 하는 무기력에 빠질 때가 많거든요. 끊임없이 돌을 나르는 시시포스가 되어 견디다 못해 포기하고 싶은 심정 정말 공감이 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고민하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봐요.
우선 본격적으로 고민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8년간 한 직장에 몸담으며 고생했을 가그린 님께 격려를 드리고 싶어요.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전환하는 세태 속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가그린 님에게는 이완의 시기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럼, 우리 이제 하나씩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 잘 다뤄줄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봐요.
가그린 님의 번아웃 사연을 읽다 보니 세 가지가 눈에 띄었어요.
첫 번째로, '뭐든 기대 이상으로 해내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감으로 살아왔고'에서 멈춰봅니다. 가그린 님은 남의 기대에 맞춰서 그에 수긍하려고 정말 애를 많이 쓰면서 살아오셨구나 느꼈어요. 잠시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를 인용해 볼께요.
우리는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p.61.
우리는 관계 속에서 실망하기도 하고, 역으로 누군가를 실망시키기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그린 님이 '그날은 이젠 못 하겠다고 느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던 거 같아요.'라고 쓰신 부분에서는 무기력감이 느껴져 안타깝기도 했지만, 동시에 본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했어요. 어쩌면, 본인의 역량을 넘어선 무리한 요구를 맞추느라 몸과 마음이 힘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가그린 님이 못 하겠다는 판단 뒤에 든 편안한 감정은 앞으로 모든 일에 “예”라고 답할 필요성이 없음을 나도 모르게 이미 알고 있다는 직감일런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의 알아차림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만큼 본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 지금 느껴지는 나의 생각들을 판단하지 않고 수용해 주세요. 남들의 기대에 맞추지 않아도 괜찮고, 남들을 실망시켜도 괜찮아요. 오히려 그것들을 받아들일 때 삶은 더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로는, '환기 삼아 여행도 다니고 있는데, 아무리 쉬어도 회복되지 않는 느낌'이라는 부분이 눈에 띄었어요. 소진되는 감정을 추스르려고 여러 시도를 하고 계시군요.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변화를 바랄 수 없는 것은 아마 물리적 거리와 몸만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뿐이지, 마음의 변화는 없기 때문일 거예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접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어디론가 떠난다고 해서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가그린 님에게 영향을 끼쳐온 많은 감정과 생각을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쉬울 순 없는 것 같아요. 나를 마주하는 경험이 꼭 특별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뒤이어 제가 번아웃이 찾아왔을 때 했던 경험들을 들려드릴게요.
세 번째로, '전직이나 이직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 회사에서 더 성장하고 싶다는 열정도 없어요.'라는 부분인데요. 이 고민은 가그린 님뿐만 아니라 많은 직장인들이 밥 먹듯 자연스럽게 하는 고민일 거예요. 평생 일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일하는 나를 돌보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일기 쓰기'를 추천하고 싶어요.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는지 기록을 이어간다면 그 속에 가그린 님이 하고 싶은 일들이 힌트처럼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이 여정은 가그린 님의 손끝에서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일기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가그린 님을 향한 기록이므로 소중할 수밖에 없겠죠. 가볍게 오늘 나를 기쁘게 또는 힘들게 한 일들을 차곡차곡 한 줄씩 쌓아 올리다 보면 가그린 님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가닿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10년 차 직장인이 되면서,번아웃을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 시간을 통과하고 있구나, 또 왔구나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어요. 저의 시작은 기록이었고, 반복적으로 나타난 키워드에 집중해 저만의 놀이터를 하나씩 만들어갔어요. 공원 산책, 음악 감상, 전시 관람, 달리기가 저의 놀이터 같은 곳인데요. 놀이터는 누가 가지 말라고 해도 재밌어서 가게 되잖아요. 가그린 님도 일상의 손 닿는 곳에 그런 공간이 있을 것이기에 자신에게 다정한 일상 관찰자가 되어 마음의 여유를 가지시기를 바라요.
잘 살기 위한 가이드라인이나 메뉴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삶에는 정답이 없고, 방향 또한 본인의 결정과 선택에 따르는 것이기에 직접 경험하는 일만큼 나를 잘 알려주는 일들이 있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양쪽에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해보며, 경험을 통해 나만의 지혜를 쌓으며 가그린 님만의 리듬과 속도로 걷기를 바랍니다.
가그린 님은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다만 지금 레이스에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내 마음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헤아리는 시간과 여유를 죄책감이 없이 가지기를 바랍니다. 가그린 님의 여정에 평안이 가득하길 바랄게요.
지금 고민이 있으시면 익명으로 밑미 고민상담소에 고민을 보내주세요. 카운슬러의 답변을 보내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