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준 시라는 세계 - 홍인혜 작가 인터뷰
‘언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나라는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기록해 가는 홍인혜 작가
'언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나라는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기록해 가는 홍인혜 작가와 밑미가 만났어요. 카피라이터, ‘루나파크'를 그리는 만화가, 작가, 그리고 시인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관찰하고 창작하고 소통하는 홍인혜 작가가 나라는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 가는 이야기를 만나볼까요?

밑미: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작가님이 최근에 내신 책 <고르고 고른 말>을 읽었어요. 책은 표면적으로 ‘언어와 말'을 주제로 전개되는 것 같지만, 사실 ‘언어와 말을 통해 나를 만나는 과정'이 책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점점 규칙과 틀에서 자유로워지는 작가님을 만나는 게 좋았어요. 나이가 먹을수록 더 얽매이게 되기 마련인데, 작가님은 그 반대로 더 자유롭고 걸림이 없어지신 것 같아요.
인혜: 시 쓰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하며 나와 비슷한 프로필을 가진 사람들만 주로 만나왔어요. 취향도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죠. 처음 시 수업을 들으면서 '21세기에 아직도 시를 위해 투신한 21세기 랭보들이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라고 정말 놀랐어요. 시를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제가 지금까지 살았던 삶과 목표도 너무 다르고, 평생 못 만나 볼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난 거예요. 밖에서 보면 우스울 정도로 단어 하나를 두고 싸우고, 시 이야기를 하면서 울고, 이런 세계가 저에게는 너무 신기했어요. 몇 살에는 무슨 직급을 달고, 몇 살에는 얼마를 모으고, 이런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시 수업을 5~6년 정도 들었는데, 수업이다 보니까 선생님이 계시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세요. 이 시는 너무 관념적이다, 너무 친절하니 조금 줄여봐라 이런 식으로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얘기를 하시는 거죠. 그런데 선생님이 하루는 “나는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 말 안 들었으면 좋겠어' 이러시는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왜냐면 우리 학교 다닐 때에는 해야 할 것이 딱 정해져 있잖아요. 선생님이 수업을 하면서 ‘너는 너무 친절하고 긴 산문시를 쓰니까, 심플하게 운문시를 써 봐라’라고 하셨을 때, 학생이 ‘싫어요, 나는 산문시로 끝장을 낼거예요.’라고 해도 그걸 하나의 길로 인정해 주는 거예요. 거기에서 좀 충격을 받았어요. 저도 사실은 엄청 정석대로 살아온 사람인데 시를 배우면서 그 틀에서 점점 벗어날 수 있었어요.
밑미: 맞아요. 시는 정말 자유로운 장르인 것 같아요. 오죽하면 맞춤법 틀려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시적 허용'도 있잖아요. 시를 쓰는 작업은 나를 좀 더 자유롭게 해줄 것 같아요.
인혜: 제가 그동안 만들었던 창작물들은 모두 클라이언트가 있고 가이드라인이 굉장히 명확한 작업이에요. 그런 결핍 때문에 에세이를 쓰거나 일상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막상 쓰다 보니 에세이도 만화도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말할 수 있는 범위가 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꾸 스스로 검열을 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지금 올바른 이야기를 하고 있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있지는 않나?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덜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 안에는 못난 부분도 있고 슬픔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모두 드러내기에는 쉽지 않았죠. 그래서 좀 더 자유로운 장르를 찾다 보니까 시를 쓰게 되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자유로운 창작을 하게 되니까 저도 틀에 갇혀서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었는데, 마음이 그런 부분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밑미: 졸사에도 영향을 주었겠네요? (졸사란? 회사를 졸업한다는 뜻! 퇴사의 다른 말)
인혜: 맞아요. 사실 시로 등단할 거라는 꿈도 못 꿨어요. 늘 등단하면 퇴사할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거예요. 그런데 바로 관두지는 못했고 추스르는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회사를 떠나서도 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는데, 다른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는 삶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서 과감하게 나올 수 있었어요.
밑미: 언어를 통해서 나를 발견하고 나의 해상도를 계속해서 높여가는 작업을 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를 잘 관찰하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인혜: 바쁜 하루를 살다 보면 나를 잘 못 돌아보고 하루가 지나갈 때가 많은데, 저는 하루를 통과하면서 회고의 시간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일기나 기도처럼 언어를 이용해서 회고를 하게 되면 좀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미드를 봤는데 ‘그녀는 내가 화가 난 게 아니라 배고픈 거라는 걸 알려줬어요.”라는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이렇게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자기 감정이 어떤지를 명확하게 모르는 게 우리인 것 같아요. 내가 무서운지 불안한지 긴장했는지, 사실 조금씩 다른 건데 말이죠. 언어로 정확하게 정의 내리면 나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돼요. 일기를 쓰려면 한 문장을 써도 그걸 생각해야 되거든요. 오늘 나 빡쳤어 라고 쓸지, 눈물 나게 분했어라고 쓸지, 나 오늘 너무 창피해서 숨고 싶었다고 쓸지. 그러면서 좀 더 명징하게 정의가 되는 거죠.
밑미: 내 감정을 들여보고 나를 관찰할 때 때때로 만나게 되는 내 부정적이고 어두운 모습을 회피하게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특히나 시를 쓰다 보면 나의 어두운 면을 많이 봐야 하잖아요. 그럴 때 작가님은 어떻게 하세요?
인혜: 원래 저를 많이 관찰하는 편이에요. 일기도 쓰고, 기록도 하고 감정 변화를 추적하기도 해요. 한때는 술을 마실 때 술의 종류에 따라서 어떻게 감정이 바뀌는지를 기록하기도 했을 정도로 내 감정 변화 폭에 관심이 워낙 많았고 나를 관찰하는 걸 좋아했어요. 그렇게 내 감정을 들여다보다 보면 어두운 부분도 만나게 되는데, 저는 제 어둡고 우울한 면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늘도 그림자도 다 내 거니까.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거면 고쳐야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 거니까 예뻐하고 잘 돌봐주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오히려 요즘은 며칠 동안 어두운 감정이 안 느껴지면 약간 불안하기도 해요. 시를 못쓰는 거 아니야? 결핍되어야 시 쓸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웃음) 어둡고 부정적인 정서를 나쁘게 바라보지 않게 된 것도 시를 쓰게 되면서 얻게 된 좋은 점인 것 같아요. 이게 창작의 동력이라는 걸 아니까 나쁜 일이 있어도 이게 나의 창작의 원천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사실 학창 시절에는 내 쭈글한 모습을 견디기가 힘들었는데, 나이가 먹고 마음이 너그러워지니까 못난 것도 나지 어쩌겠어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밑미: 맞아요. 나이를 잘 먹는다는 건 어쩌면 나와 잘 화해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어요.
인혜: 맞아요. 그게 심해져서 나는 무조건 옳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적당히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고 중간값을 찾아가는 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밑미: 책을 읽다 보니 내향인으로서 에너지 관리를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들도 많이 보였어요. 평소 에너지 관리를 어떻게 하세요?
인혜: 여러 사람 틈에 있을 때에는 에너지가 줄줄 새는 찐 내향형이라 공식적인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미묘한 표정과 말투와 분위기와 온도 습도까지 예민하게 다 들어오거든요. 사람들 틈에 있는 상황에 처하면 계속 그것에만 신경 쓰게 되니까 의식적으로 스케줄을 짤 때 밖에서 부딪히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약속이 있다면 하루라도 여유를 주는 식으로 나를 파악해서 추스르려고 해요.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녀석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요.

밑미: 책에 보면 혼자 매일 꾸준히 하시는 게 정말 많으신 것 같아요. 밑미는 리추얼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니, 평소에 인혜님이 어떤 리추얼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해요.
인혜: 직장 생활을 15년 했기 때문에 퇴사를 하며 ‘이제 나는 리추얼도 루틴도 없이 살겠다.’라는 강렬한 목표를 가지고 시계도 달력도 안 보고 살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1년 정도 사니까 좀 망해서 심하게 우울감이 오기도 하고 집에만 하루 종일 있으니 낮밤이 바뀌기도 하고, 프리랜서이자 재택근무자로서 삶이 너무 늘어진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를 옭아 매지 않는 아주 간단한 리추얼을 만들어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첫 번째는 사실 되게 시시한 건데, 조카가 태어나면서 환경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도 생기면서 생수를 끊었어요. 대신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약수터에서 물 떠오듯 필터 정수기로 물을 정수하고 오늘 하루 마실 차를 끓어요. ‘오늘 같은 날은 연잎차야' 이런 식으로 매일 아침 그날 기분에 맞는 차를 끓여 마셔요.
다른 하나는 매일 먹는 시간을 정하자는 게 있어요. 처음에는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정하자고 생각했는데 제가 야행성이라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 정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고요. 글이 밤에 잘 써지기도 하고요. 그리고 30년 넘게 시계 알람 맞춰서 일어나는 거 했으니까 이제 몸이 저절로 깰 때 일어나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너무 늘어지면 건강이 무너지니까 아무리 늦어도 오후 2시, 저녁 8시 전에는 밥을 챙겨 먹는다고 정해서 그 정도는 지키려고 노력을 해요.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자기 전에 일기를 쓰죠. 사실 저도 매년 계획을 세우고 1-2월에 빡세게 하다 3월쯤에 흐트러지긴 하는데, 아직까지는 매일매일 꼬박꼬박 쓰고 있어요.
밑미: 최소한의 리추얼이라는 말이 밑미가 이야기하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나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리추얼을 통해서 오히려 자유롭게 해주고 나를 느슨하게 풀어주는 거죠.
인혜: 저는 사실 불안 정서가 높고 자신에게 엄격한 편이에요. 그래서 완벽주의 성향도 있고, 멋있는 모습이 아니라 숨기지만 비교도 많이 하고 질투도 많아요. 그래서 남들이랑 비교하면서 나만 왜 이렇게 쭈구리 같냐 이런 생각 진짜 많이 하는 사람인데, 내가 나를 모질게 몰아세우는 성향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구나를 깨닫고 나를 조금씩 풀어주고 놔주는 과정이 나이 드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책에도 점점 더 시선이 성글고 느슨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썼는데, 나한테 모질게 몰아세우지 않고 조금 더 나를 느슨하게 풀어주고 좀 더 우쭈쭈 해주면서 늙어가고 나이 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실제로 되게 많이 해요. 인생이라는 게 나를 좀 더 많이 알아가고 공부해 나가면서 이 녀석을 잘 추슬러 나가는 과정이구나 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