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 지 모르겠는 마카밸리의 고민

마카밸리의 고민
“친한 친구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래 알고 지내던 가까운 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울증을 앓았던 터라 많이 걱정했었는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겁니다. 잘 지내는지 찾아가 본 게 얼마 전인데, 제가 생전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되었어요.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한 번 더 찾아갔더라면. 그날 내가 더 잘 챙겨줬더라면. 이상한 낌새를 더 예민하게 알고, 입원 절차를 밟게 애썼더라면. 방치했다는 생각, 무책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 친구의 아픈 마음 돌보는 것을 버겁게 느끼고 있었던 것을 누구보다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친구에게 들켜버려서, 그래서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무섭습니다.
사람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편이면서도 동시에 너무 곁을 내어주진 않는 성격인지라, 이런 제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그 친구를 더 돌보아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지 겁이 납니다. 또, 그 친구가 저처럼 건강한 가정 속에서 경제적 안정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면서,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제 삶이 어쩐지 불편합니다. 빈부격차가 존재의 격차까지 만들어 내는 지금의 세상이 과연 맞는 것인가 싶으면서도, 그렇다면 나는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지내야 하는 것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도하는 마음이 저와 제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들지는 않았으면 하는데, 충분히 애도한다, 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저는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을 연습해야 할까요? 상실, 애도, 이별에 관한 좋은 책이 있다면 추천해 주셔도 좋습니다.

밑미 메이트 강원의 답변
“슬픔의 궤적을 따라 천천히 걷는 길을 애도라고 부르기로 해요. ”
안녕하세요, 마카밸리. 보내준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먼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마카밸리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그러게요. 충분히 애도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저도 요즘 자주 품고 있는 질문입니다. 작년에 저는 제 인생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엄마를 떠나보냈습니다. 예전엔 그냥 스쳐 지나가던 물음들이었는데, 이제는 삶을 멈춰 세우는 질문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인지, 편지에서 느껴진 막막함이 깊이 와 닿았습니다. 편지 한 통으로 마카밸리와 친구 사이의 관계를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껴졌어요. 마카밸리에게 그 친구는, 삶을 돌아보게 만들 만큼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사람을 잃고 나면, 삶은 절대 다시는 명백해지지 않는다. 다시는 삶이 그냥 한 가지가 될 수 없다.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지금껏 알고 있던 삶이 갑자기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말이다.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245)
친구가 세상을 떠난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과 감정이 얽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우려했던 일’이라고 표현한 부분,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가정이 얼마나 마음을 붙잡고 늘어질지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만, 지금 마카밸리가 겪고 있는 애도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저는 진심으로 존중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마카밸리 역시, 친구를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편한 질문에 정답을 찾는 일보다, 질문 자체를 외면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떠난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마카밸리는 이미 그렇게 애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돌보는 일도 잊지 않았으면 해요. 그리고 언젠가, 친구가 세상을 떠난 방식을 넘어, 그 마지막 선택까지도 친구가 살아낸 삶의 일부로 품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 삶 전체를 껴안을 수 있는 평안함이, 애도의 여정 속에서 마카밸리에게 닿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애도. 정말 애도란 무엇일까요.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의 삶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삶을, 사람을 떠올리다 보면 불현듯 ‘만약’이라는 질문이 떠오르고, 그 물음 앞에 온종일 슬퍼지고 무너지게 되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던 삶이 갑자기 멈추는 경험을 합니다.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는 별개로, 저는 어떤 날엔 ‘죽음’이라는 사건이 내가 간신히 구축해 놓은 삶에 일어난 불쾌한 사고처럼 느껴졌어요. 무엇보다, 그 사고의 영향으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절대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동시에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이 무엇보다 소중해졌습니다. 요즘 저는 슬픔을 새로 배우는 중인데요. 슬픔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무서움, 자책, 불편함—마카밸리의 편지에 담긴 감정처럼—그 모든 것이 슬픔 안에 겹겹이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어쩌면, 애도란 슬픔을 경유한 관계 맺기일지도 모르겠어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건이 변형시킨, 이제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존재와 나 사이의 관계. 그 고유한 관계를, 애도라는 형식으로라도 이어가는 일. 아니, 저는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애도는 장례처럼 정해진 의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관계 맺기의 연장선이라고요. 그러니 누가 어떻게, 얼마나 애도해야 한다는 정답은 없겠죠. 어떤 관계는 누군가의 삶 속에 평생 깊숙이 자리를 잡기도 하니까요.
애도는 마치 내가 원치 않았지만 떠나게 된 여행 같아요.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여행. 우리는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야,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서야 비로소 이런 멈춤을 경험합니다. 충분히 애도한다는 건, 그 멈춤이 마련한 여행을 기꺼이 떠나는 일이 아닐까요. 그 슬픔의 궤적을 따라 천천히 걷는 길. 우리, 그것을 애도라고 부르기로 해요. 마카밸리와 저는 어쩌면 그 여행길 어딘가에서 만난 귀한 인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별의 슬픔을 이겨내려면,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서 부서져 내린 많은 조각을 자신에게 접합시켜 온전한 무언가로 거듭나야 한다. 부서진 게 맞지만, 다시 이어 붙일 수 있다. 온전한 형태로 말이다. 이것이, 누군가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살아 있는 당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슬픔의 궤적이다. 죽은 이를 슬퍼하는 모든 이들이 여행하는 길이다.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309)
저의 사적인 답장이 마카밸리에게 어떤 위로가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만난 이 책이, 제 애도 과정을 여행으로 바라보게 도와줬기에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나 홀로 떠난 고된 여행이라 생각했는데, 그 여정 가운데 마카밸리를 만나게 되어 참 좋았습니다. 편지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고민이 있으시면 익명으로 밑미 고민상담소에 고민을 보내주세요. 카운슬러의 답변을 보내드립니다.




